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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드러머 걸' 무엇이 박찬욱의 나르시시즘을 지웠나[리뷰] 원작에 대한 심취와 존경심, 연극과 영화의 숙명적 본질을 감각 있게 구현하다
박형준 | 승인 2019.04.01 15:40

정신적 문제·감정 농락·민간인 이용: 존 르카레가 보는 첩보기관

'리틀 드러머 걸' ⓒ왓챠플레이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카레(John Le Carre)는 실제로 영국 SIS·MI6 등 첩보기관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존 르카레는 영국 정부를 위해 근무하던 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등 소설을 집필하는 등 작가를 겸업하다가, 일정 수익을 거둔 후 활동을 그만뒀다.

그의 첩보원 경력이 사실상 강제로 끝장난 계기 중 하나는 '케임브리지 5인조'의 일원인 킴 필비(Kim Philby)의 첩보 활동이었다. 

'케임브리지 5인조(Cambridge Five)' 사건은 1960년대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 엘리트 5명이 소련의 이념에 동조해 영국의 외교부와 첩보기관 등의 내부기밀을 모조리 소련에 전달한 사건을 말한다. 이때 소련에 넘어간 것 중 하나가 존 르카레의 신분이었다.

전업 소설가가 된 존 르카레는 첩보기관의 비인간성과 그에 예속된 첩보원들의 비극적 운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관이 가장 잘 스며든 작품은 2011년 게리 올드만 주연 영화로 제작됐던 바 있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였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속 MI6 소속 첩보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편집증 등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는데다가, 감정을 농락당하거나 희생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그들을 보면 씁쓸함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대목을 접하면, '본 시리즈'를 관통하는 대사 "우리 꼴 좀 봐. 저것들(CIA)이 너한테 무슨 짓을 시키는지 보라고(Look at us. Look at what they make you give)"와 일맥상통하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존 르카레는 민간인을 꼬드겨 첩보전 한복판에 세워놓고 이용해 먹는 첩보기관의 비인간성을 주목하는 작품도 자주 제시했다. 이런 성향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는 평범한 출판업자를 모스크바 한복판에 세워둬 이용해 먹는 '러시아 하우스(The Russia House)'가 있다. 이 작품은 1990년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로 제작됐던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2018년 방영 6부작 영국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도 민간인을 꼬드겨 첩보전 한복판에 세워놓고 이용해 먹는 첩보기관의 비인간적인 잔인함을 묘사했다. 

'리틀 드러머 걸'의 감독판은 3월 29일 왓챠플레이에서 최초 공개됐고, BBC 방영 버전도 채널A를 통해 방영되고 있다. 

첩보전과 연극, 현실과 가상설정 사이에서

'본 아이덴티티'(2002)에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제이슨 본(맷 데이먼 분)이 기겁했던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소지품이었던 수많은 위조 신분증들이었다. 

우리 영화 '공작'(2018)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외국이나 적지에 침투한 첩보원은 당연히 위장 신분을 자칭한다. 이는 배우의 연기와 일맥상통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리틀 드러머 걸'의 한 장면 ⓒ왓챠플레이

'더 리틀 드러머 걸'에서는, 1979년을 배경으로 이스라엘 모사드가 영국의 무명 연극배우 찰리(플로렌스 퓨 분)를 꼬드겨 아랍 테러 조직에 침투시킨다. 

이어 모사드 요원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타스가드 분)는 고위 간부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 분)의 기획과 지시 하에 찰리가 테러 조직 간부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나아가 찰리 스스로 테러조직 일원이라고 착각하도록 지도한다. 한마디로, 마틴 쿠르츠는 영화나 연극의 기획·제작자 역할을, 가디 베커는 감독 역할을 맡은 것이다.

즉, 모사드는 찰리라는 배우를 내세워 일생일대의 메소드 연기를 주문한 셈이다. 하지만 연극은 연극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찰리와 가디는 임무와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싹트는 감정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면서 갈등한다. 

그들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마틴은 더더욱 차갑고 사악하게 보인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주제의식과 비슷하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익을 위해 감정을 희생당해야만 하는 첩보원의 숙명과 비인간적인 첩보기관의 속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측면은 '본 시리즈'에서 악인이 '애국' '국가'를 거론하는 설정을 연상시킨다.

연극과 현실의 간극을 감각적으로 조절하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은 캐릭터들이 느끼는 내적 갈등을 시청자에게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더 리틀 드러머 걸'은 구조상 '러시아 스파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가 된다면, 두 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박찬욱 감독의 원작에 대한 존경심

기자는 '복수는 나의것'(2003) 외에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 전반을 지배할 정도로 지나친 나르시시즘과 자신의 영화 지식 자랑을 위한 '나열'이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나열도 조화를 시켜야 의미가 살아나지만, 나열을 위한 나열을 하는 측면이 강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리틀 드러머 걸'은 그와 같은 나르시시즘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 놀라웠다. 그 배경에는 스스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연출을 강렬하게 원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존 르카레의 작품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이 존경심은 자연스러운 서사 구조와 장면 전환, 나아가 첩보기관의 비인간적 속성 속에서 불거지는 사람의 내적 갈등은 물론, 연극과 첩보 활동의 숙명적 본질에 대한 통찰로 연결된다.

이 존경심은, 박찬욱 감독이 한때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기 때문에 놀라울 수 밖에 없다.

 "사실 더 (영화로) 만들고 싶은 만화는 '멋지다 마사루'와 '아즈망가 대왕'이었습니다만, 도저히 원작을 능가할 자신이 없어서…. (중략) 관객 여러분께도 이 영화(올드보이)를 보고 나와서 최소한 15분 동안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시기를 정중히 권유하는 바입니다." - 박찬욱의 '몽타주'

위 발언은 "내 영화 '올드보이'는 원작 만화를 능가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에게 "네 인생을 반성하라"는 훈계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저런 발언을 하던 사람이 '나르시시즘'이라는 결코 버릴 수 없는 자신의 고유 색깔을 거의 버린 채 원작에 심취해 물 흐르듯 흐르는 작품을 연출했으니, 기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리틀 드러머 걸'의 한 장면 ⓒ왓챠플레이

따라서 기자는 '리틀 드러머 걸'을 통해 존 르카레의 카리스마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확신에 찬 나르시스트까지 자신을 숭배하게 만든 그 카리스마를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자는 '리틀 드러머 걸'이 조만간 환갑을 맞이할 박찬욱 감독에게 일대 전환점이 되길 바라고 있다. 첩보와 연극의 간극을 훌륭하게 조절한 원숙한 연출력에 감탄했던 그 느낌이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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