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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세대 갈등이 부른 끔찍한 비극[리뷰] '노론메이슨'이 사라진, 실록 속 영조와 사도세자를 만나다
박형준 | 승인 2015.09.17 06:00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의 허구성

언제서부턴가 사도세자와 정조를 다룬 사극의 주된 소재는 '노론의 음모'였다. 말인즉, 왕보다 더 강한 당파 노론이 사도세자를 영조에게 모함해 죽이도록 조직적으로 움직였으며, 세손도 즉위하지 못하게끔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조선 임금들 중 태반이 독살을 당해 죽었다고 책을 쓴 어떤 사학자는 정조가 즉위식 때 이 말을 함으로써 피바람을 예고했다고 주장한다.

"아! 과인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그런데 그 학자는 정조의 다음 발언은 늘 빼고 이야기한다.

 "선대왕께서 종통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께도 고하겠다.

 재해석

 우리 할아버지가 정통성 때문에 나를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시켜 즉위시키셨고, 나도 동의한다. 우리 아버지는 대부(정1품에서 종4품 사이 벼슬하는 선비)의 예로 모실 것이고, 우리 어머니 혜경궁도 대비와 같은 예우를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헛된 무리들이 우리 아버지를 왕으로 추숭하자고 주장하면, 우리 할아버지 말씀도 있고 하니 법으로 다스리고 할아버지의 묘에도 고하겠다.

- <정조실록> 1권, 1776년 3월 10일 4번째 기사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사도세자에 관한 명을 내리다>의 일부

노론이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임금도 위협하고 세자도 죽이고 세손도 위협했다는, 일명 노론메이슨설(노론이 마치 프리메이슨처럼 조선을 지배하며 왕을 갈아치웠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실록의 기사다.

사실 사도세자의 힘은 아주 강했다. 왕실의 정통성은 혈통으로부터 비롯된다. 숙종의 왕권이 왜 강했냐면, 가장 가까운 종친이 육촌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위협할 종친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유일한 아들이자, 숙종의 유일한 손자였다. 가장 가까운 종친이 무려 십촌이다. 누구도 그의 정통성을 공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영조의 나이는 무려 만 68세이다. 당시로서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내일 즉위할지도 모르는, 늙은 임금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고 십촌인 종친을 왕위에 올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비상식적이다.

<사도>의 한 장면, 저작권자 - (주)타이거픽쳐스

사극에서 사도세자의 정적으로 늘 거론되는 김상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당시 파직당해 조정에 없었다. 파직당한 이유는 우습게도 "세자를 옹호한 죄"였다. 사도세자의 또다른 원수로 알려진 홍계희도 마찬가지의 죄를 지었다며 치도곤을 당한 바 있다.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했다는 이른바 '나경언의 고변' 때에도 조정이 발칵 뒤집어진 이유는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고 당파가 합심해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숨겨왔기 때문이다. 영조도 그래서 이와 같이 반응했다.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세자)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 <영조실록> 99권, 1762년 5월 22일 2번째 기사 <동궁의 허물을 아뢴 나경언을 친국하고 복주하다>의 일부

이준익 감독 연출의 <사도>는 노론메이슨설의 대부분을 거부하고, 절륜한 연기를 자랑하는 송강호와 유아인을 앞세워 두 부자(父子)가 어떻게 파국에 이르렀는지, 실록에 기반한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했다.

아들이라도 변덕스러운 감정 기복은 감당하지 못한다

사도세자는 효장세자 사후 영조가 마흔이 넘어 얻은 아들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바로 원자에 이어 세자에 책봉됐다. 세자가 읽을 책도 영조 스스로 직접 필사했을 정도.

<사도>의 한 장면, 저작권자 - (주)타이거픽쳐스

하지만 문제는 영조 자신이었다. 지나치게 혹독했으며, 감정의 기복도 심했다. 갓 마흔을 넘기는 조선 임금의 평균 수명으로부터 비춰볼 때,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라 빨리 왕으로 키워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나쳤다. 오죽하면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다. 영화 <사도>에서도 묘사하는 장면이다.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된지 한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영조가 분부했다. 

 "오늘은 곧 원량(세자)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영의정 김재로와 좌의정 조현명이 고한다.

"성진 방영은 도로 길주에 소속시키는 것이 편리합니다."

"육진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아홉 갈래가 있는데, 길주는 요충에 해당하지만 성진은 단지 세 갈래 길만 막을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말한다.

"방영을 비록 길주에 도로 소속시키더라도 성진에 역시 군졸이 있는가?"

김재로 왈 "진졸이 있습니다."

사도세자 왈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옳겠다."

영조 왈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나에게도 품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 <영조실록> 25권, 1749년 2월 16일 1번째 기사 <환경전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시좌하고 차대를 행하다>의 일부

쉽게 말해, 영조는 "나는 앉아서 보기만 한다"고 당부했다가, 사도세자가 뭔가를 결정하니 냉큼 "왜 나한테 안 물어보냐"고 사도세자를 혼낸 것이다. 그것도 영의정과 좌의정의 조언을 듣고 결정한 것에 대해 이런 '갈굼'을 시전한 것이다.

매사 이런 식이었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영조가 한번 야단을 치면 그렇게 매서울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정신을 공황상태로 만든 것은 영조 본인이다. <사도>는 실록 속에 묘사된 영조가 사도세자를 괴롭힌 방식들을 담담하게 그린다. 총명했던 사도세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 문제를 겪는 과정 또한 유아인의 처절한 연기와 어우러져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사도>의 한 장면, 저작권자 - (주)타이거픽쳐스

영조와 사도세자를 비추어 보며 세대간 갈등을 우려한 이준익 감독

영조는 힘겹게 왕위에 올랐다. 아들이 없는 이복형 경종의 동생으로서 왕세제를 거쳤다. 그를 반대한 당파 소론의 강경파는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으며, 역적으로 이름을 거론했다. 이런 힘겨운 투쟁 와중에 "승하 직전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권해 복통을 일부러 유발했다"는 혐의를 안고 겨우 왕위에 올랐다. 결국 그가 임금임을 부정한 이인좌의 난도 일어났다.

자신이 이렇게 힘들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늦게 얻은 귀한 아들 사도세자는 평탄하게 왕이 되길 바랐다. 그 힘든 과정 끝에 성격 또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리하여 아들은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좋은 상황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임금이 되길 바랐다. 자신의 경험에 비춰 자녀가 그 힘든 경험을 하지 않길 바라지만,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자녀를 이해하고 납득시키려는 시도가 빠진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오류이다.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아버지 영조는 종잡을 수가 없는 아버지이다. 시키는대로 해도 혼나고,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당연히 혼난다. 틈만 나면 양위하겠다며 자신을 괴롭히기까지 한다. 조금만 쉬고 있어도 공부를 게을리한다며 무지막지한 '갈굼'이 기다리고 있다. 열심히 공부하려다가도 하기 싫어진다.

성격은 나날이 파탄난다. 쉽게 말해 아버지는 그저 '성격 나쁜 꼰대'일 뿐이다. <사도>에서도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왜 공부를 제대로 못하느냐"고 야단을 친다. 불행히도 그 아버지와 아들은 임금과 세자였다. 그들의 갈등은 결국 나라의 환란이 된다. 

이준익 감독은 이들 부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세대간 갈등을 우려한 한 것 같다. 언론이 구조적인 구직난에 대해 "부모와 자녀가 일자리를 두고 싸우는 형국"이라고 진단할 정도의 상황이다. 그 이전 세대도 산업화 세대 부모와 민주화 세대 자녀의 갈등이 있었다.

이제는 민주화 세대 부모와 인터넷 세대 자녀가 경제적인 이유로 갈등을 일으킨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대화가 단절됐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은 대화 단절이 부른 끔찍한 사건이다.

현대 정신의학에 따르면, 영조는 편집성 인격장애로 진단되며, 사도세자는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추정된다는 의견도 있다는 것 또한 덧붙인다.

정조는 모순적 존재, 아버지가 죽어야 하는 이유이자 부자 간 화해의 상징

<사도>의 한 장면, 저작권자 - (주)타이거픽쳐스

박시백 화백은 만화 <조선왕조실록>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사도세자가 비행을 멈추지 않는 상황이지만, 나이 칠순에 이른 영조와 신하들로서는 그를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하들도 그의 비행을 숨기느라 급급했다. 하지만 세손이 너무 영특하고 취미 또한 공부였기 때문에 '후계자'로서 손색이 없었다.

게다가 세손을 왕위에 올린다 한들 사도세자가 왕의 생부로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위를 역으로 탈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세손이라는 대안이 생긴 순간, 사도세자의 죽음은 예정됐다."

이 주장은 정병설 서울대 교수도 주장하는 바이다. 영화 <사도>도 이 해석을 따른다. 정병설 교수가 검수에 참여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뒤주 감금 사건의 계기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고변이었다. 혜경궁 홍씨도 아들인 세손의 보호에 주력했다. 장인 홍봉한도 사위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사도>는 이런 정황을 슬프지만 담담하게 묘사한다. 유아인의 걸출한 광인(狂人) 연기와 어우러져 정치의 비정함,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의 서글픔이 절로 느껴진다.

아들 정조는 "절대로 네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지 말라"는 영조의 당부를 지켰다. 하지만 아버지의 끔찍한 죽음도 잊지 않았다. 묘를 이장하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고 명명하며 '묘'에서 '원'으로 그 격을 높였다.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송충이들이 주변 소나무들을 갉아먹자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고 호통치며 송충이를 씹어삼켰다는 전설이 생겼을 정도로 아버지를 자주 찾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파탄난 관계를 손자가 그들이 죽은 이후에 조율했다.

우리는 이토록 갈등하지만 미래의 희망을 져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조는 보통 조선의 마지막 중흥 군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의 절절한 호소가 느껴지는 키워드가 바로 정조이다. 소지섭이 성인이 된 정조로 특별출연할 정도로, 이준익 감독이 정조에 애정을 기울인 이유는 아닐까.

박형준  ctzxp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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