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올려도 돈 쓰는 미국인들…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

“높은 물가와 경기침체 우려가 소비 증가를 누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 브라이언 모이니한 BOA 최고경영자

미국에서 2번째로 큰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브라이언 모이니한 최고 경영자가 올해 3분기 실적 발표 때 한 말입니다. 모히니한 CEO가 말한 것처럼 ‘높은 물가, 경기침체 우려’만 있는 게 아닙니다. 금리도 전 세계가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오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이 은행 CEO는 자사 고객들의 돈 쓰는 씀씀이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 겁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최근 발표한 분기별 수익 보고서에서 3분기에 71억 달러의 이익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는 8% 감소한 것이지만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많은 것입니다. 모이니한 CEO는 3분기 고객의 소비가 많았다며 “고객들의 예금 잔고가 코로나19 사태 발생 이전보다 여전히 높기에 소비 지출이 계속 강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특히 신용카드 지출은 13%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은행의 최고재무책임자인 알라스테어 보스윅은 “소비자들이 아주 좋은 상황인 것 같다”며 “소비자들이 빠른 속도로 소비하고 있고 높은 이자율에도 대출금을 갚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신용카드 씀씀이를 봤을 때 높은 물가와 고금리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은 지출을 줄이지 않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습니다.

■ 미국인, 신용카드 씀씀이 크다

앞서 지난 9월 국제결제은행(BIS)은 강달러가 미국인들의 상대적 소비력을 끌어올렸다고 분석했습니다. 국제결제은행은 “미국이 40여 년 만에 가장 높은 물가상승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기간 미국 소비자의 상대적 구매력이 이보다 높았던 적은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높긴 한데 그 원천이 대출이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미국 상업은행의 신용카드와 리볼빙서비스를 통한 소비자 대출은 코로나 위기 이후 줄어드는가 싶더니 지난해 4월을 기점으로 급격히 늘어 10월 5일 기준 9,187억 9,0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고금리로 돈 씀씀이가 줄어들 것이란 예상과 달리 대출을 늘려서라도 소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신용 조사 기관 ‘익스페리언(Experian)’의 최신 조사를 보면 현재 40~50대인 미국 X세대의 신용카드 빚은 평균 7,155달러, 우리 돈 1,000만 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자료를 보면 미국의 평균 신용카드 연이율은 15.91%로 카드 대출을 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하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빚을 지고서라도 소비를 하고 있습니다.

■ 저축률은 금융위기 이후 최저…”일단 쓰고 보자”

미국인들의 신용카드 대출이 왜 이렇게 늘고 있을까요? 가지고 있는 돈이 없거나 바닥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의 개인 저축률은 2008년 이후 최저 수준인 3.5%까지 떨어졌습니다. 1959년 이후 평균 저축률 8.95%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입니다.

코로나19 규제 해제 이후 집 밖으로 나온 미국인들은 그동안 소비를 늘려왔습니다. 코로나 위기 이후 임금인상률이 높았던 데다가 팬데믹 기간 정부에서 지원되는 돈이 쌓이면서 저축률이 역대 최고치를 찍었죠. 이렇게 1년 넘게 저축한 돈을 그동안 써왔지만, 어느새 저축률은 2008년 금융위기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겁니다. 모을 돈도 없고 쓸 돈도 이제 없어지게 된 거죠. 세계 3대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7월 전망에서 올해 말부터 미국 내 저소득층의 저축이 바닥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는 지난 14일 “미국 경제에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다”면서 코로나19 팬데믹 때 소비자들이 쌓아놓은 저축이 내년 중반에 모두 소진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 바닥나면 소비자들은 그때부터 소비를 줄이려는 모양새입니다. 그 시점이 올해 말이냐, 내년 초냐, 중반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 소비가 곧 꺾일 거라는 신호…”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다”

언젠간 분명히 소비가 꺾일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는데 그렇다면 그게 과연 언제일까요?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9월 소매 판매는 시장이 전망한 0.3% 증가와 달리 전달과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8월 0.4% 증가를 비롯해 올해 들어 대부분 증가를 기록했지만 7월 -0.4%에 이어 올해 처음으로 보합세를 보인 겁니다.

미국 GDP의 70%를 차지하는 소비가 전반적으로 곧 둔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소매판매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스토랑 같은 음식점업은 0.5% 상승한 반면 가구점 매출은 -0.7%, 전자제품점 매출도 -0.8%를 기록했습니다. 취미, 악기, 서점 매출도 줄었습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지요? 외식 비용은 늘었지만, 노트북이나 TV, 침대, 책상처럼 돈을 들여 오래 사용해야 하는 제품과 취미나 여가활동에는 돈을 줄였다는 겁니다. 지금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안 사는 거죠. 사실 따지고 보면 음식점업 판매가 늘어난 것도 물가가 상승해 가격이 오른 걸 감안하면 늘어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조금만 더 이어지면 결국 소비 전체가 위축되는 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문제는 중산층 아래 계층입니다. 고물가는 고소득층이나 중산층을 괴롭히지 않고 돈이 없는 그 아래 계층을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전략 컨설팅업체 EY파르테논의 그레고리 데이코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소비자들이 기꺼이 지출할 의향이 있는 반면 특히 소득 중·하위계층은 물가 상승과 이자율 상승으로 인해 점점 더 소비에 제약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조정한 ‘실질 소매판매’를 보면 분명한 차이가 보입니다. 지난달 실질 소매판매를 보면 1년 전 같은 기간과 비교해 0%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그대로라는 겁니다. 전달과 비교하면 -0.4%를 기록했습니다.

실질 소매판매 증감의 역사를 보면 앞으로 미국 경기가 어떻게 될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위 그래프에서 흑백 음영으로 표시한 구간이 경기 침체 구간입니다. 1973년, 1978년,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오일쇼크 발 경기침체, 2000년 닷컴버블,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까지 모든 경기침체 기간에 실질 소매판매는 마이너스(-)를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코로나 위기 이후 급격히 올라갔던 실질 소매판매 그래프가 기준점 0%를 뚫고 아래로 내려오는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에 추세상 조만간 경기침체가 올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겁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은 법입니다.

■ “실업자들 앞으로 쏟아질 것…침체 없이 물가 못 잡는다”

래리 서머스 미국 전 재무부 장관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평균 침체는 3%p의 실업률 증가를 불러온다. 연준은 4.5% 정도를 보고 있는데 현재 인플레이션 수준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실업률이 현재 3.5%에서 6%까지 올라가는 게 더 나은 추정이다. 침체 없이는 임금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과거 미국 경기침체의 역사를 보면 분기당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 이상, 실업률이 5% 이하였을 경우 1년 안에 경기침체가 왔던 확률은 100%였습니다. 높은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리기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리는데 경기가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래리 서머스 전 장관의 전망대로라면 앞으로 수많은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겁니다. 미국 경제매체 마켓워치에 따르면 미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최근 다양한 부서에 걸쳐 1,000명가량의 직원을 정리해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외에도 테슬라, 구글, 메타 등도 잇따라 인력감축과 신규 채용 축소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 같은 해고 바람은 기술 기업에서 시작해 점차 전통 제조업으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인플레이션과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미국 경제가 내년 봄부터 경기 침체에 들어설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CEO도 내년 상반기 경기침체를 경고했고, 데이비드 솔로몬 골드만삭스 CEO는 “경기침체 가능성이 크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내할지 확인하며 조심해야 할 시기”라고 투자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소비 증가세가 줄어든 걸 볼 수 없다”는 뱅크오브아메리카 CEO의 메시지는 자칫 지금 미국 경제가 좋다는 잘못된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신용카드 소비가 줄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그 소비의 원천이 대출이었다는 점,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이 바닥난 소비자들이 대출로만 몰리면 경기침체보다 더 큰 위험이 올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과거 위기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